2015년 겨울, 도쿄 오챠노미즈에서 신주쿠로 가는 츄오쾌속선 전차 안이었다. 거기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광고 중에서도 내 정면에 있어 눈에 띄었던 광고가 하나 있었다. 한 턱 긴 남자가 황금 빛 배경에서 맥주잔을 들고 그 이상 시원해보일 수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자의 옆에는 "10년 연속 판매 1위! 기린 노도고시!"라는 문구가 대문짝하게 걸려 있었다. 남자의 표정과 문구에 이끌려 괜히 호기심이 생겼다.
그에 못 이겨, 다음날 신주쿠 4쵸메의 호텔로 돌아가는 밤, 신주쿠역 남쪽출입구 앞 산쿠스 편의점에 들러 노도고시 한 캔과 카루비 데리야키 마요네즈 맛 감자칩을 샀다. 노도고시는 작은 사이즈 캔이 100엔데 초반의 가격 밖에 안 되어 가격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것 같았다. 난방을 할 줄 몰라 쌀쌀한 호텔 방에서 옷을 갈아 입은 뒤, 침대에 누워 카루비를 뜯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마요네즈를 뿌린 데리야끼 닭꼬치 맛과 감자칩의 맛이 유사하여 안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문제는 노도고시.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맛있어서 일본 갈 때마다 마신다고 호평을 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건 맥주도 아니라고 거침 없이 혹평을 내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의견은 후자의 쪽이다.
캔을 딸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칙'하고 짧게 끊기는 소리는, 김 새는 콜라의 뚜껑을 다시 여는 양 가벼웠다. 물론 소리만 가지고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거기에서 온 불안한 예감은 확실히 들어맞았다. 냄새도 그렇다. 캔을 따라가자마자 스물스물 나온 냄새는 맥주보다도 소주의 것과 더 비슷했다. 곡물의 냄새는 그저 겉돌기만 하였다. 남은 과정은 마시는 과정. 촉감부터 말하자면, 합격점을 줄 만하다. 맥주 이름 그대로 목(노도)을 시원(고시)하게 하는, 목넘김이 좋은 맥주였다. 한 모금 들이킬 때, 탄산의 그 시원함이 식도를 쭉 타고 흘러 내려갔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목넘김이 강조되는 한국 맥주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듯, 노도고시도 목넘김 빼면은 시체였다. 이것은 일본에서 만드는 한국 맥주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맛이 없었다. 입에 한 모금을 넣자마자 든 생각은 '밍밍하다'는 것이었다. 냄새에서도 그랬듯이, 곡물의 맛은 그저 표면에서 겉돌 뿐이었고, 실은 에탄올이 들어간 탄산수 같았다. 에비스나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같이, 소위 말하는 깊은 맛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과는 정반대였다. 이게 뭐야, 하고 얼굴을 찡그린 뒤, 얼마 안 하는 맥주 값조차 아까워서 입에 털어넣고 깡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감자칩만 입에 넣어대기 시작했다. 이딴 맥주를 1위로 만드는 일본인들의 입맛에 이해가 안 갔다. 가격과 목넘김 빼고 남아 있는게 없었다.
노도고시는 일본에서 유행하는 '제3의 맥주'의 대표주자이다. 일본에서는 제대로 만든 맥주에는 '맥주'를, 곡물을 일정비율 이하로 줄이고 다른 재료를 늘린 맥주를 '발포주', 그리고 아예 대두를 베이스로 하고 곡물향을 첨가한 맥주를 '제3의 맥주'라고 한다. 제3의 맥주는 발포주보다도 맛이 떨어지는 대신 '싸다'는 강점 하나로, 어떻게든 '시원함'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오죽하면 '가난한 유학생들의 친구'란 말까지 붙었을까. 아무튼 이 노도고시란 것도 그렇고, 드라이 맥주란 것도 그렇고, 일본 맥주는 그다지 맛있다고는 할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굳이 고른다면야 에비스를 고르지.
무슨 No.1이란거야!
여기서 왜 갑자기 '노도고시' 이야기를 꺼내느냐, 이번에 이야기할 '한자와 나오키'라는 드라마에서 이 맥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카이 마사토. 앞에서 말한 노도고시 광고의 턱 긴 남자이자, '한자와 나오키'의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되시겠다. 근래, 이 드라마와 '리갈 하이', '사나다마루' 등으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배우이다. 사실 그를 처음 접하게 된 것도 어지보면 그 광고 덕분이니, 첫 만남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표정에 깜빡 속아넘아가, 나의 표정은 일그러졌으니.
단순히 '노도고시'와 '한자와 나오키'가 같은 배우를 사용한다는 점으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김희애가 나오는 작품에 관해서는 SK-II 화장품을 다뤄야하고, 이정재가 나오는 작품에 관해서는 버거킹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앞에서 노도고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작품 그 자체가 노도고시와 닮았기 때문이다.
한자와 나오키의 전반적인 배경은 은행이며, 그 주인공 '한자와 나오키' 역시 대표적인 화이트 칼라 직종인 은행원이다. 비록 게이오대를 나오고 융자과장, 영업차장에 오른 엘리트라고는 하나, 일단 화이트칼라로서의 대표성은 분명히 지닌다. 그와 대척점을 지닌 아시노 지점장, 오오와다 상무와 같은 자들은 그들을 관리하고 괴롭히는 상관이다. 이 방송의 주요 시청자가 직장인임을 감안할 때, 적절한 인물 구성이다. 주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해내는 일종의 판타지에 빠지고, 이에 시청률은 비례하여 상승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에게 끝까지 복수하고, 바가지를 전혀 안 긁어대며 자신의 복수까지 도와주는 천사같은 아내, 자신을 끝까지 신뢰하는 부하직원을 가진 한자와는, 직장인들이라면 당연이 꿈꿀만한 롤모델이다. 상사가 괴롭혀도 아무 말 못하고, 아내는 바가지를 긁어대고, 부하직원은 자신을 무시하는 현실과는 정반대인 실제를 잊을 수 있다. 직장인들은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일요일 밤에 지난 한 주의 스트레스를 풀고 다음 한 주를 준비한다. 마치 일요일 밤에 저렴한 가격으로 목을 축여주는 노도고시 같이, NHK 수신료만 빼면 따로 내는 돈 없이 한 주를 푸는 역할을 이 드라마가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노도고시에 관해 혹평을 했 듯, 이 드라마에 관해서도 완전히 좋은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분명 이 드라마는 재미 있고, 심지어는 내가 지닌 금융계로의 꿈을 북돋아주기까지 했으나, 돌아보면 노도고시 같이 속은 가다지 특별한 것이 없었다.
흔히 일본 드라마에 관해 비판이 되는 요소는 플롯의 전형성이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인공이 동료들과 이를 멋지게 해결하고, 마지막에 모두 모여 축하하는 그런 감동적이지만 전형적인 전개. 키무라 타쿠야의 HERO도 그랬고, 오다 유지의 춤추는 대수사선도 그랬다. 일부만 제외하고, 소재만 다양할 뿐이지 이들은 이 전형적인 플롯을 계속 쓰고 있다. 한자와 나오키가 화이트 칼라라는 공감하기 쉬운 소재를 쓰고, 복수의 결과가 '도게자'라는 일본에서는 강렬한 것이어서 그렇지 플롯 자체는 이를 따른다. 이는 마치 곡물 향기만 그럴듯하게 첨가해 놓앗지, 속은 대두로 만든 술인 노도고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드라마가 소재를 선택하는 데에 탁월하여 상업적 성공을 이룬 것은 그것대로 호평을 받을 만 하지만.
이 밤이 지나면...
플롯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이 드라마를 노도고시에 비유하는 이유는 '일요극장' 시간대라는 점이다. 노도고시를 마시고 나면 뭐가 남는가. 빈 캔, 캔의 잔향, 입의 탄산, 취기, 그리고 2시간 밖에 안 남은 일요일이다. 취기가 깨면 월요일이고,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직장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판타지는 깨지고, 일상은 다시 시작된다. 오오와다에게 도게자를 받는 것. 이는 통념의 선을 넘은 직장인의 위험한 소망이다. 이렇게 판타지로 통쾌한 결과가 연일 터지나, 마지막 회, 오오와다는 은행에 남게되고 한자와는 출향을 하게 되낟. 물론 이는 나카노와타리 회자의 고단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 시청자는 그 때만큼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다. 마지막의 한자와의 눈은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의 눈으로 봐야한다. 매 화마다 쾌감을 기대하다가 배신감을 줘버린 이 드라마는, 마찬가지로 쾌감을 기대하다가 배신감을 줘버린 노도고시와 같았다. 복수의 상쾌한 목넘김 뒤에는 일상의 밍밍함만 남았다.
2015년 6월, 오사카에서 다시 한번 노도고시를 샀다. 이번에 마시면 다르겠지, 하고 한 모금 마셨지만 겨울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또 한번 나를 실망시켰다.
드라마판의 내용 이후의 원작 소설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사카이 마사토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드라마판 2기가 나온다는 소문도 계속 들려온다. 언젠가는 다시 한자와의 또다른 이야기를 접하게 될 것이다. 다음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될 땐, 전형적인 플롯을 벗어나, 배신감을 주지 않고, 끝까지 쾌감을 나에게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노도고시로는 다시는 만나지 말자.